"트럼프 현상과 딥 스테이트"
간혹 숫자에 꽂힐 때가 있다. 7110만 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획득했다는 표의 수다. 우리나라 국민보다 많고,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 이전 최고기록으로 당선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득표수(6950만 표)보다도 많다. 대선 투표율 추정치는 66.8%. 1900년 이후 120년 만에 최고란다. 이로써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고 투표율을 기록한 대선에서 역대 최다 득표를 기록한 패배자가 됐다.
그동안 내게 트럼프 대통령은 남의 나라 대통령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의 행보도 한·미 관계나 무역에 미치는 영향력과 그 향방 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언론에 비친 모습, 즉 인종차별적 언행과 적과 아군을 나누는 편 가르기 식의 행태, 무례하고 거친 언행, 경박한 트위터 정치, 체면을 모르는 퍼스낼리티 등 그다지 긍정적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패자의 깨끗한 승복’을 미국 대선의 미덕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미 승패가 갈린 투표 결과를 놓고 ‘부정 선거’를 주장하며 불복을 선언한 그의 모습은 마치 히어로물에 나오는 악당 빌런(villain)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와 그의 지지자들은 선거 결과에 격렬하게 저항한다.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겼다. 숫자를 뜯어봤다. 역대 최고 투표율의 의미는 무엇일까. 유권자들은 누구는 트럼프를 뽑기 위해 투표장으로 갔고, 누구는 트럼프를 떨어뜨리기 위해 투표장으로 간 것으로 보였다. ‘트럼프 vs 바이든’이 아니라 ‘트럼프 vs 안티 트럼프’의 선거가 아닌가 하는 정황. 언론은 트럼프의 패배를 놓고 분열과 배제의 정치에 대한 심판이라거나 그의 천박한 정치에 유권자가 등을 돌린 것처럼 보도한다. 그러나 그는 오바마 전 대통령보다도, 그가 당선된 지난 대선보다도 더 많은 표를 얻었다. 그건 미국이 ‘분열’된 모습일 수는 있어도, 유권자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린 모습은 아니다. 7110여만 표의 지지는 강고하다.
왜 그렇게 이상적이라던 미국의 민주주의는 이처럼 분열한 것일까. 모두 트럼프 탓일까. 오랜만에 프랑스 정치철학자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를 다시 읽었다. 내가 미국 민주주의 체제를 이해했던 교과서 같은 책이다. ‘평등’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지만 사람들이 그에 안주하면 자신의 사익 추구에 몰두한 나머지 정치에는 무관심해지고, 그러다 보면 마침내 국가가 모든 개인의 권리 위에 신적 의지로 군림하게 된다는 것. 그리하여 대중민주주의는 ‘다수의 폭정’ 혹은 ‘말랑말랑한(soft) 전제정치’로 타락할 수 있다는 경고. 평등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동질화를 요구하는 압력으로도 작용하고, 다수의 의견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는 자유롭지만 그에서 멀어지면 사회적으로 추방되는 도덕적 압력으로도 존재한다는 게 토크빌이 말한 ‘민주주의의 부작용’이다.
트럼프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냈던 한 교수는 “1년 내내 트럼프 욕만 들었다”고 했다. 한 재미교포 지인에게선 “미국의 썩어빠진 민주주의를 치료할 유일한 대안은 트럼프”라는 말도 들었다.
‘굴러들어온 돌의 정치’. 『미국은 왜 아웃사이더 트럼프를 선택했는가』(김앤김북스)의 저자 빅터 데이비스 핸슨은 트럼프의 정치를 이렇게 표현했다. 2016년 대선에서 정치적 경험이 없다는 이력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 것은, 기성정치권 사람들이 서로 엮여서 잘못되어가는 현실을 바로잡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현실에 유권자들이 넌더리를 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정계와 언론계는 스스로 말하는 모럴과 행동규범과는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든 지 오래란다. 한 입으로 두말하고, 자신들의 유불리를 저울질하고, 비빌 언덕을 만들어놓는 등 자기는 ‘꽃길’로만 가려는 기득권층. 이들에 대한 반감이 트럼프 지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더이상 공공의 이익에 봉사하지 않는 자기 권력화된 관료집단, 정부조직, 시민단체, 언론 등 기성세력을 ‘딥 스테이트’(Deep State)로 부른다. 대중은 이렇게 나라의 이익에 기생해 자기 이익만 챙기는 자들을 경멸하는 트럼프의 모습에 통쾌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엔 트럼프 이전에 이미 ‘딥 스테이트’라는 말랑말랑한 전제정치 형태의 민주주의 부작용이 있었고, 이 부작용에 대한 반작용이 ‘트럼프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대중이 빌런(villain)에 열광하는 것은 부조리한 현실을 더이상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때이다. 한데 미국을 거울삼아 우리를 비춰보니 우리도 남의 말할 처지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우리가 촛불로 박근혜 정권을 탄핵한 것은 박 전 대통령 개인의 무능도 있었지만 ‘딥 스테이트’에 대한 염증도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촛불 이후 우리의 딥 스테이트는 해소되었는가. 과거 보수의 무능과 그에 기생하는 세력들의 탐욕과 무절제가 딥 스테이트의 악몽이었다면, 지금은 진보가 자리바꿈만 한 것 같은 양상이다. 나아진 게 없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딥 스테이트’는 진영의 이익만 좇는 정치 세력들만 정치를 장악하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진짜 민주주의’를 원한다면 이젠 국민이 정치를 공부해야 한다.
2020년 11월 14일 양선희 중앙일보 대기자